21세기에 들면서 인류는 문명사적 전환기를 경험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다. 현재 세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출발한 2,000년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큰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 변화이다.

남반부로 이동하는 기독교
첫째는 기독교가 더 이상 서구의 전용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에 의해 언급된 개념이지만1 최근에 필립 젠킨스(Philip Zenkins)는 저서 「다가올 기독교 왕국」(The Next Christendom)2에서 중요한 관찰의 결과를 보여주었다. 즉 이제까지 기독교는 서구의 종교였고 따라서 기독교 왕국이라 하면 서구 교회를 지칭했다. 그러나 20세기 말부터 2/3세계권에서 교회가 성장하는 반면에 서구권은 인구 감소와 더불어 기독교 인구가 점차 줄어들면서 지금은 기독교 인구의 반 이상이 남반구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1900년에 북반구의 기독교 인구가 남반구의 2.5배였으나 2050년이 되면 정확히 반대로 된다. 다시 말해, 이제까지 전형적인 그리스도인이라 하면 백인 중산층을 지칭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을 그려본다면, 나이지리아나 중국의 가정 교회 그리고 브라질의 슬럼가에 사는 여인들을 생각하게 된다. 즉 아시아와 남미와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남반구에 근거를 둔 새로운 기독교 왕국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지금까지 기독교가 경험하지 못한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다. 기독교가 남반구로 이동하면서 남반구 사회에 내재된 문화에 스며들어 많은 변화를 일으키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남반구 기독교인들은 신앙이나 도덕적 가르침에서 매우 보수적이다. 또 남반구 교회들은 개인적 깊은 신앙, 공동체의 정통성, 신비주의, 청교도주의를 설교한다. 그들의 메시지는 서구 사람들이 보기에 단순히 은사주의, 환상, 예언 등을 강조하는 것처럼 들린다. 사고 중심의 세계에서 예언은 일상적인 것이 되고 믿음 치유, 귀신 내쫓는 일, 꿈과 환상 등이 종교적 접촉의 기본적 구성 요소가 된다.

따라서 남반구의 교회들은 신앙에서 매우 보수적인 형태를 취하게 된다. 예를 들면, 성공회의 세계주교회의에서 그 수가 더 많아진 아프리카의 주교들 때문에 동성애를 인정하는 문제가 부결되었다. 또 보수적 신앙은 한걸음 나아가 근본주의적 성향으로 나타나게 되고, 그 결과로 종교들의 근본주의적 입장은 종교간 화해와 공존보다 대립으로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오늘날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충돌이 자주 일어나는 것이다.

서구 교회의 정체성 혼돈
둘째는 서구 교회의 정체성에 관한 혼란이다. 북반구에서 기독교 인구의 감소는 단순히 교회의 감소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기독교 전체의 정체성을 바꿔가는 것으로 나타난다. 서구 혹은 기존의 기독교 국가에서 기독교가 그 영향력을 잃어버린 것의 핵심은 바로 세속화의 결과다. 이 문제를 가장 심각하게 지적한 사람은 네슬리 뉴비긴(Nesslie Newbigin)3이다. 뉴비긴은 영국인으로 인도에 선교사로 갔다. 그는 평생을 인도에서 사역하면서 한 번도 영국을 방문하지 않았고 은퇴 후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귀국해서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가 영국을 떠날 때만 해도 영국 사회는 기독교가 그 중심에 있었고 기독교 가치가 사회 가치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그가 영국을 떠나 있는 40년 사이에 영국 사회는 더 이상 기독교가 사회 가치의 핵심 역할을 하지 못하고 주변 문화로 밀려났다. 그것은 세속화의 결과였다.

영국인들의 삶과 사고의 중심에 있었던 기독교가 불과 몇 십 년 사이에 껍데기만 남은 것이다. 세속화가 다원주의로 이어지면서 그 결과로 기독교의 가치도 상대화되는 환경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기독교는 더 이상 종교의 핵심도 아니고 사람들의 가치를 주도하지도 못하게 되었다. 한 예로 영국의 레체스터에 가면, 지난 1792년 개신교 선교 운동을 출발시킨 윌리엄 케리가 목회했던 교회가 있다. 최근에 그 교회가 폐쇄되고 불교 사원으로 바뀌어 강대상이 있던 그 자리에 불상이 놓여 있다. 그리고 도시 중심부에 힌두교 사원, 이슬람 모스크, 각종 종교들의 사원이 교회와 마주보고 있어도 사람들은 아무런 문제 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즉 기독교는 더 이상 서구의 종교도 아니며 서구 사회의 가치와 문화도 지배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서구 교회의 이슈가 되었다. 이런 현상은 서구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 선교의 꽃을 피우고 있는 한국 교회도 곧 경험하게 될 것이다.

서구의 기독교 확장사
서구에서 기독교의 확장 과정을 살펴보면,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기 이전 단계 즉 ‘전기 기독교 왕국시대’와 콘스탄틴 대제의 기독교 인정 후부터 20세기까지 지속된 ‘기독교 왕국시대’ 그리고 오늘날 ‘후기 기독교 왕국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교회는 여러 가지로 변화의 특징을 갖고 있다.
전기 기독교 왕국시대에서 기독교 왕국시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로마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으로 되길 자청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알렌 크레이더(Alan Kreider)는 전기 기독교 왕국시대에서 기독교의 특징은 교회가 갖고 있던 독특성때문이라고 주장한다.4 당시 교회가 핍박을 받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독특성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았지만 정확하게 세금 내는 일을 거부하지 않았고, 원형 경기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어 죽어갔지만 그들의 얼굴에 평화가 넘쳐났다. 그리고 세상에서 나그네와 같은 위치에 있었지만 영원한 처소를 소망하며 오히려 그 삶을 특권으로 여겼다. 그들의 독특성이 세속에 물들어 있던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따라서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 결과, 교회는 점차 커지게 되고 마침내 교회가 세상의 중심이 되는 기독교 왕국시대가 된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왕국시대에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교회에 들어오게 된 이유는 교회의 독특성 때문이 아니라 교회가 주는 기득권 때문이라는 것이다. 교회가 사회의 중심이 되고 권력과 지배력을 발휘하게 되자, 사람들은 교회에 들어옴으로써 유익을 얻게 되었다. 교회의 구성원이 되면 요람에서 무덤까지 모든 삶이 교회를 중심으로 이뤄지면서 유익과 기득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서구의 기독교 왕국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20세기에 서구 사회에서 기독교 왕국은 그 껍데기만 남은 후기 기독교 왕국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교회에서 얻는 유익 이상으로 세상에서 얻을 수 있고, 교회가 주장하는 절대적 가치는 상대화되었으며, 교회가 말하는 가치에 통제를 받을 필요성을 느끼지 않게 된 것이다. 결국 교회는 사회의 중심에서 주변으로 밀려나게 되었고, 복음의 영향력은 그 힘을 잃고 전도는 더 이상 이뤄지지 않는 처지에 이르렀다. 여기에 서구 교회의 몰락 원인이 있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기독교 국가였던 영국이 이제 더 이상 기독교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나라로 바뀐 것을 목격한 레슬리 뉴비긴은 영국 사회의 기독교 회복을 위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여러 저서를 통해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려고 노력했다. 그 핵심이 바로 오늘날 세속적 다원주의 시대에서 복음은 무엇이며 어떻게 전달돼야 하는가이다. 복음이 다원주의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복음 전도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복음이 세속 문화를 뛰어넘는 능력임을 보여주지 못하는 한 더 이상 세상은 복음에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이런 뉴비긴의 생각을 오늘의 서구 교회에 적용하고 그 대안을 만드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복음과 문화 네트워크(Gospel and Our Culture Network)이다.

이 운동의 핵심 단어는 ‘미셔널 처치’(Missional Church)이다. 굳이 번역하자면 ‘선교적 교회론’이다. 이 말은 단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선교하는 교회 혹은 해외 선교에 참여하는 교회 정도를 뜻하지 않는다. 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말이다. 즉 오늘날 세상에서 주변 문화로 전략해 버린 교회가 그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가져야 할 위상이 ‘미셔널’(Missional)이라는 것이다.

미션(Mission)이라는 말은 원래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신약 성경에서 사도(apostle)와도 동일하다. 이것은 초대 교회 때 교회의 위상 즉 나그네로서 보내심을 받은 자의 위상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초대 교회 때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공동체로 다가갔던 것은 기독교가 갖고 있던 보내심을 받은 나그네로서의 정체성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늘날 세속 사회에서 교회가 다시 한번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공동체로 다가서기 위해선 그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소수 집단이었고 나그네였지만 천국에 대한 소망 때문에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의 영향력에 대해 자유로우며, 내면에 더 큰 평화와 기쁨이 있고 세상의 권력과 전혀 다른 영적 힘을 갖고 있으며, 나그네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현재의 위치를 떠날 수 있는 모습들이 사회에 더 큰 영향력으로 자리 잡는 정체성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목회자의 정체성 변화
그런 공동체를 이끄는 지도자의 모습도 변화해야 한다. 초대 교회에서 지도자를 사도(apostle)라고 불렀다. 그들은 새롭게 초대 교회를 만드는 과정에서 선지자의 역할을 했다. 즉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통해 교회를 만들어 갔다. 기독교 왕국시대 즉 중세에는 사역자를 신부(priest)라고 불렀다. 이 단어가 주는 이미지는 예배를 인도하고 교회의 권능을 보여주는 권세자였다. 종교개혁 시대에 목회자의 이미지는 교육자(pedagogue) 혹은 교사(teacher)였으며 성경의 교리를 가르치고 설명하는 자였다.

그 후 계몽주의 시대에 목회자의 이미지는 전문가(professional)로 바뀌었다. 이런 이미지는 오늘날까지 전달되고 있는데 즉 설교 전문가, 상담 전문가, 구제 전문가 등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 사역자들은 전문적인 기술을 갖추도록 요구받고 있고, 또 교회에서 각종 전문가들을 전임 사역자로 임명해 목표를 세워 교회를 운영하고 있다. 따라서 세상 사람에게 비춰지는 목회자 상은 경영인이다. 과연 이런 목회자의 이미지와 역할이 미래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될지 의문이 든다.

성경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나그네로 본다. 아무것도 없는 나그네가 아니라 영원한 소망과 진정한 평화 그리고 고정된 가치를 갖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자신이 처해 있는 자리나 위치에 연연하지 않고 영원한 소망과 가치를 알리며 그대로 살기 위해 떠나는 나그네의 삶, 순례자의 삶, 보내심을 받은 자의 삶(missional)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 교회의 미래를 생각해 본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짧은 기간에 전기 기독교 왕국시대를 통과하고 기독교 왕국시대에 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교회는 그 수와 영향력에 있어서 엄청난 위치에 있다. 그래서 힘도 있고 세상에 대한 영향력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기간이 얼마나 더 지속될 것인가이다. 최근 한국 교계 신문에 실리는 교회와 관련된 뉴스들은 참담하기 그지없다. 교회 안에서 목회자들 간의 권력 다툼은 더욱 심각해지고, 교단 내 문제들은 대부분 권력과 이권과 관련된 것들이며, 교회가 세상의 이데올로기 논쟁의 한복판에서 소리를 높여 가고 있다. 교회가 기득권의 장으로 이해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망하게 된다는 것이 서구 교회가 주는 교훈이다.

이제 한국 교회와 목회자들은 나그네와 순례자로서의 정체성, 떠나는 교회(missional Church)의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세상에서 복음의 확산과 진정한 영향력을 주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한철호_ 선교한국 상임 총무, 2006.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