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은 유대교, 기독교와 함께 하나의 신을 섬기는 유일신교이다. 역사 속에서 그것은 또한 유대교, 기독교와 같이 아브라함으로부터 유래하는 공통의 믿음의 뿌리를 가지고 있으며, 이슬람교도인 무슬림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간주되어 왔다. 이와 같은 이슬람의 세계 역사 속에서의 형성과 발전에 대하여 이야기하여 보자.

1. 이슬람의 출현
1) 이슬람 출현 전의 아라비아 반도
이슬람 발생 이전의 시대를 무슬림들은 자힐리야라 부른다. 이 명칭은 아랍사람들이 이슬람에 개종한 이후에 붙인 것으로 무지라는 뜻 외에도 신앙의 암흑시대라는 뜻도 숨어 있다. 또 이 시대를 아랍 알 야움(그날의 아랍인)으로도 부른다. 즉 철부지 시절의 아랍사람이란 뜻이다. 이 두 명칭은 은연중 이슬람을 광명으로 보는 시각에서 나온 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시대는 이슬람 발생 이전 200-300년간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 시기는 이슬람의 수임 기간이라 볼 수 있다.

이슬람이 발생한 직사각형의 아라비아반도는 그 넓이가 약 300만 평방km로서 인도아대륙에 버금갈 정도로 크다. 그러나 반도의 남쪽에 위치한 예멘을 제외한 다른 지역은 강우량이 적어서 대부분 사막과 같은 건조지역이다. 중앙지역에 높은 산들이 있기는 하나 만년설이 쌓일 정도로 높지는 않아 하천에 물을 일년 내내 흘러 보내지 못한다. 간혹 비나 눈이 내릴 때에만 하천 역할을 하는 물길을 아랍인들은 와디라 부른다. 반도의 내륙에는 광대한 사막이 펼쳐 있고 그 주변에는 넓은 초원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반도 곳곳에는 오아시스가 흩어져 있다. 이런 반도에는 베두윈(사막의 유목민)과 오아시스의 정착민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둘 다 부족 단위로 공동생활을 영위하였다. 베두윈은 넓은 사막을 배회하면서 초원을 찾아 방목하여 생활을 꾸려 나갔으며, 오아시스의 정착민은 농경 생활을 영위하거나 상업 활동을 통하여 생계를 이어 나갔다. 이 반도의 부족들은 늘 서로 싸웠으며, 부족의 구성원들은 자기 부족을 위해 싸우는 것을 명예로 알았다.

당시 아라비아 반도의 신앙형태는 다신교였고, 애니미즘적 성격이 강한 원시적인 것이었다. 기원 70년경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에 유대교의 아라비아 반도의 침입은 시작되었다. 홍해 연안을 따라서 남하한 유대교도는 야스리브(메디나)와 예멘에 정착하게 되었다. 반도 북부 변경에는 기독교 단성론과 네스토리우스파가 들어왔다. 중부의 히자즈 지방이나 남부의 나즈란에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정착하고 있었다.

2) 무함마드의 등장
6세기 후반에 들어 비잔틴 제국과 페르시아의 사산조 간의 오랜 전쟁으로 말미암아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왕래하던 대상들은 다른 지역보다 아라비아 반도를 더욱 안전한 통행로로 선호하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몇몇 도시들은 성장하여 이와 같은 교역의 신장을 주도하고 이익을 취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도시는 메카였다. 570년경 이 도시의 지배 부족이며,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는 쿠라이쉬족으로부터 무함마드가 출생한다. 그는 쿠라이쉬족의 하심가에서 출생했으며, 어려서 고아가 되었다. 그는 삼촌에 의하여 양육되었다. 성인이 되어 부유한 카디자에게 봉사하다가 그녀와 결혼하여 경제적 안정을 얻게 되면서부터 중년에 이르도록 부유한 상인으로서의 생활을 계속한다.

610년경 그는 신들인 상태의 종교적 체험을 겪게 되는데, 이 체험은 그 자신의 생애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전 세계의 많은 부분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당시 아라비아 반도의 주민 대다수는 다신교를 믿고 있었으며, 기껏해야 아랍어로 하나님을 뜻하는 ‘알라’라고 불리는 한층 강력한 신의 우월성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종교적 체험을 통하여 알라 이외에는 신이 없다는 유일신 사상을 갖게되며, 신이 그에게 계속 보내 오는 메시지를 바탕으로 유일신 사상을 주변에 전파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그의 이런 노력은 쿠라이쉬 부족 지도자들이 그들의 이해에 반한다는 생각 때문에 배척되었고, 커다란 성공을 거두지 못하다가, 622년에 수백명의 추종자와 함께 메디나로 이주한다. 이해는 후에 이슬람역의 원년이 된다.

3)이슬람의 형성
무함마드는 메디나에서 이슬람 공동체(움마)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아라비아 반도에서 최초로 생성된 이념 공동체이다. 무함마드는 이 공동체를 세우고 아라비아 반도에서 단위 부족의 요직인 부족장, 점술사, 중재자 및 전시 지도자의 기능을 자신의 한 몸에 집중시킨다. 즉, 그의 신의 사도로서, 중재자로서, 군사령관으로서 제정 일치의 모든 권한을 쥔, 여느 부족장들과는 다른 강력한 종교적 , 정치적 지도자로 등장하게 된다. 그는 메디나의 유대교도를 몰아내고, 메카와 세 번에 걸친 전쟁 끝에 무슬림군을 이끌고 630년 그가 죽을 때까지 이슬람 깃발 아래에 아라비아 반도의 대부분 지역을 통일한다. 이리하여 무함마드는 신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로서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을 세상에 남겼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지도자로서 그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이슬람 공동체를 실질적 정치 세력으로 아라비아 반도 내에 형성시켜 놓는다.

2.이슬람 제국의 확장
1) 정통 칼리프 시대(632-661)
무함마드는 신도들에게 꾸란과 이슬람 공동체의식, 무슬림으로서의 모범적인 생활방법을 제시하고 죽었다. 그러나 그의 사후에 이슬람 공동체는 아랍 부족들의 이반에 따라 한때 붕괴의 위기에 직면했지만, 그의 후계자로서 칼리파로 뽑힌 아부 바크르의 노력으로 재통일되었다. 제 2대 칼리파 오마르 때에는 대정복이 개시되었고, 한 순간에 이슬람 국가의 판도는 아라비아 반도를 벗어나 동서로 확대되면서 제국으로 변모하였다. 이를 뒷받침한 것이 아랍 부족들로 이루어진 이슬람 전사단이었다.

그 후 칼리파의 자리는 오스만에서 알리로 계승되었고, 이슬람 공동체는 다시 내란의 위기에 직면했다. 이것은 알리와 우마이야가의 무아위야와의 지도권 다툼이였으며, 이것에 깊이 관련되어 있던 것이 하와리즈파이다. 그들은 이슬람 공동체가 지닌 윤리성을 극단적으로 추구한 과격파로 공동체가 급속한 확산에 의하여 세속화되는 것에 종교적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무아위야 및 그와 타협한 알리의 행동을 잘못이라고 규탄하고 그들 양자와 싸웠다. 결국 661년 알리가 그들에 의하여 암살당하고 정통 칼리프 시대는 종말을 고했다. 그 후 90년 동안 공동체의 지도권은 우마이야 조가 독점하게 되었다. 이런 기존 이슬람 체제(이를 인정하는 다수파를 순니파라고 부른다.)에 대하여 공동체의 지도권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피를 받은 알리의 후예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집단이 시아파이며, 이들도 우마이야조를 비(非)이슬람적이라고 비난하며 하와리즈파와 같이 우마이야조에 대해서 무력저항을 계속했다.

2).우마이야조 시대(661-750)
반 우마이야조의 움직임에 대하여 우마이야조는 신앙은 행위와 관계가 없다는 무르지아파의 주장에서 지배의 정당성을 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엄한 탄압으로 맞섰다. 우마이야조 하에서도 제국의 확장은 계속되었지만 영토의 확장이 곧 이슬람화로 연결 지어진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무슬림의 정치적 지배를 받아들이는 피정복민은 일정한 조건 아래 <이슬람의 평화>와 신앙의 자유를 향유했다. 따라서 이슬람의 지배영역은 우마이야조 말기까지 이미 서쪽은 아프리카의 전 비잔틴령과 스페인에까지 이르고, 동쪽은 중앙아시아와 인더스강 유역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제국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우마이야조하의 이슬람 공동체는 평온하지 못했다. 정부의 세속적 성격이나 아랍인 우위의 정책은 비(非)아랍 무슬림인 마왈리와 원리주의적인 신도의 불만과 반발을 유발시켰다. 이것은 시아파와 하와리즈파의 운동과 결부되었고, 나아가서는 아랍 부족대립과도 연결되어 활발한 반정부운동을 일으켰다. 우마이야조의 칼리파들은 이슬람 공동체를 새로운 환경 속에서 확대.유지.발전 시키는 데에 힘썼으나 이슬람적으로 다지는 데는 실패했고, 또 무엇이 이슬람적인가 하는 것에 관한 기준도 미처 확립하지 못했다. 결국 압바스가는 이와 같은 불안정요인을 최대한 결집시켜 가며 오랜 노력 결과 반란에 성공하여 750년 우마이야조를 쓰러뜨리고 압바스조를 세웠다.

3).압바스조 시대(750-1258)
이슬람 제국의 우두머리가 우마이야조에서 압바스조로 바뀌어진 것은 혁명이였다. 그것은 궁전의 음모나 쿠데타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강력한 혁명적 조직과 선전에 의하여 달성된 것이다. 이때부터 제국은 아랍계이건 비(非)아랍계이건 무슬림이면 누구나 똑같은 권한을 부여하여 주었다. 압바스조는 국가 통일의 원리가 이슬람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그때까지 민간학자들 사이에서 정비되어 가고 있던 이슬람법에서 국가통치의 기초를 찾았다. 그리하여 쿠라이쉬족 출신인 칼리파가 다민족적 공동체를 하나의 법 밑에서 단일국가로서 지배한다는 이상에 가까운 형태를 실현했다. 이렇게 해서 우마이야조 하에서 세속적 성격이 강하며, 아랍적인 제국은 압바스조 하에서 진짜 이슬람 제국으로 변모했다.

압바스조의 칼리파는 실질적인 권력의 바탕을 정규군에 두었고, 권력의 행사는 봉급 생활자인 관료 기구를 통하여 행사했던 전제군주였다. 따라서 그의 권위는 아랍 부족의 지지에 의지하던 우마이야 칼리파보다 훨씬 높았다.

압바스조하의 이슬람 제국은 다인종 국가로서 농업과 상업과 같은 평화시의 경제에 바탕을 둔 국가였다. 제국의 경제 규모는 우마이야조 시대에 비해 훨씬 대형화되었으나, 정복 사업의 중지로 더 이상 크게 확장되지 않았다. 압바스조가 등장하고 우마이야조가 무너지는 과도기를 틈타 서쪽 변방 지역인 스페인과 북아프리카 지역은 점차 분리 현상을 보이고 있었으나, 제국의 중심부인 중근동 지역은 그나마 통일을 지탱하여 9세기 중엽까지 제국의 모습을 유지했다.

그러나 제국의 영토가 너무나 크고, 중앙 정부의 내분이 자주 일어나게 되자 제국은 급격히 아랍, 페르시아 및 터키인의 영주가 다스리는 지역으로 분열되기 시작하였다. 허약한 중앙 정부는 이 현상을 묵묵히 받아들여야 했다. 945년 시아파인 부와이흐가 바그다드를 점령하자 칼리파는 어떤 권한도 행사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고, 압바스 제국은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이름뿐인 칼리파와 압바스 제국은 1258년까지 유지되다가, 비(非)무슬림인 몽골의 홀라구에 의해 바그다드가 함락됨으로써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 후에도 이슬람 세계에 칼리파를 자칭하는 사람은 있었으나, 이름에 걸맞은 실체를 가지지 못하였고, 이슬람 법학자도 그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제국이 분열과 쇠퇴를 거듭하는 동안에 지방에 따라서는 유능한 통치자가 출현하여 경제적 문화적 활동을 장려했고, 이것은 결과적으로 900년경부터 1250년경까지 이슬람 문명의 절정기를 만들어냈다. 또한 제국이 사라진 후에도 이슬람은 확산을 거듭하여 18세기에 유럽이 이슬람 세계로 진출하여 올 때까지 서쪽으로는 대서양 연안 , 북쪽으로는 오스트리아 비인 앞, 남쪽으로는 중부 아프리카, 동쪽으로는 필리핀까지 확산되었다.

4).이슬람 문명의 특징
아랍 이슬람 제국이 중근동에 번영하고 있는 기간에, 일반적으로 사라센 문명으로 알려진 하나의 문명이 생겨났다. 이 문명은 아랍인이 아라비아 반도의 사막에서 가져온 기성품도 아니고, 정복을 완수한 후 개종한 여러 인종, 즉 아랍 족, 페르시아 족, 이집트 족, 시리아 족 등의 순수한 무슬림의 문명만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수많은 기독교도, 유대교도 및 배화교도 등도 이 문명을 창조하는데 공헌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명은 아랍어로 표현되었고, 이슬람 세계관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 문명의 알맹이는 곧 언어와 신앙 두 가지였다.

아랍인 주도로 이룩된 이슬람 문화의 현저한 특색은 특유한 융화력과 동시대의 주변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상대적 관용성이다. 그러나 이슬람 공동체의 사회는 인생과 우주를 수직적으로는 밀접히 관련되나, 평면적으로는 느슨하게 얽어매어 놓을 정도여서, 각각 분리된 원자체의 구체적 집합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자기가 살고 있는 도시는 구역, 조합, 씨족 및 집의 혼합체여서 개인은 이 소집단에 속하지만, 각 개체 또는 전체의 유기적인 조직체의 구성 분자로서 이에 대한 소속감과 충성심이 결핍되고 있는 것이다.

이슬람 형성 시기에 발달하였던 아랍인의 개인주의적 태도는 오직 베두윈 가운데만 그대로 남아 있고, 문명의 중심지인 도시에서는 소극적이거나, 심지어 방관적인 태도로 바뀌어 갔다. 또 모두가 이론상 이상적인 이슬람적 인간과 사회 즉 무함마드와 이슬람 공동체인 움마를 모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결국 자유로운 여러 활동을 추구하는 이슬람 발생기부터 10세기까지의 상업 시대는 정체적인 원리주의 대두와 함께 끝났고, 합리주의적 사고방식은 억눌리고 이슬람의 새로운 각본, 즉 완고한 교리가 확립되어 19세기 유럽 문명이 동방으로 진출할 때까지 중근동 세계를 지배해 왔다.

이슬람 문명은 탄생기부터 기독교 문명권과 경쟁 관계에 있었으며, 십자군의 침입, 근세의 서구 열강의 식민 통치, 서구와 이스라엘의 협조적 관계로, 비록 발달된 서구 문명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심정적으로 늘 거부적이다. 이것은 우리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