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wart. How are you doing ? Bromley: STL Books, 1984)

우리는 자주 모국에서 외국을 바라보면서 선교는 오직 하나님의 분명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감당할 수 있는 매우 특별한 사역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신약성경에서 가르치는 “어떻게 선교에 참여해야 되는가”하는 제자훈련의 기본적인 성경의 가르침을 살펴본다.

1. 너의 눈을 들어…”(요한복음 4장35절)
아주 이상한 열광적인 한 그리스도인 사역자는 모국에서의 장면들 – 강렬함, 사역에 대한 묵상, 총체적인 연결 등 – 이 외국 사역에 비교하면 매우 미약한 것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을 분리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며, 개인적인 연결이 전혀 없는 외국을 위해 부담을 갖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여러 차례 도전은 논쟁과 함께 사실의 곁으로 사라지는 것이 사실이다. “주님께서 나에게 지역에서 전도하는 비젼과 부담을 주셨다. 선교가 나의 비젼은 아니다” 이것은 선교에 대한 관심의 부족이 그의 잘못은 아니다라는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시야를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즉각적으로 보다 높고 넓은 곳으로 향하기를 기대하고 계신다고 여러 곳에 있다. 헬라어로 ‘epairo’ 는 두 방향에서 나아오다라는 뜻으로 ‘epi’는 위, ‘airo’는 올리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특정한 장소로부터 임시적으로 격리되어지는 훈련으로, 즉각적이며 긴급하게 선교와 선교사 그리고 우리 자신의 문화 밖에 있는 사람들의 필요들에 관심을 지니기 위해 찾아 나서는 것이다. 이것은 극히 성격적이다.

2. “밭을 보라”(요한복음 4장35절)
Tendal성경(TEV)은 “무르익은 밭을 보라”고 번역했는데 이것이 보다 정확한 번역이다. 왜냐하면 ‘보라’는 말에 일반적인 헬라에 ‘blepo’를 사용하지 않고 보다 깊은 의미의 풍만하다는 의미를 지닌 ‘theaomai’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 단어에서 바로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theatre(극장)’이 나왔다. 그리고 극장을 찾는 사람들이 단지 무대와 스크린을 가끔씩 그냥 쳐다보는가? 아니다. 한곳을 고정하여 바라보는 것, 깊은 집중이 바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4장35절에서 말씀하신 “보라”, ‘주의 깊게 지속적으로 관찰하라’의 의미인 것이다.

그 밭은 예수님에 의해서 마태복음 13장38절에 “이 세상”이라고 규정지어져 있다. 교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거나 선교행사에 참석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매달 선교사들의 방문을 통한 고상한 관심 또한 전적으로 표면적인 것에 불과할 뿐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자신들이 세계선교의 현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 이에 대한 자세한 사항들을 찾아 나서게 되길 기대하고 계신다.

다른 말로하면 우리가 세계를 품을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신다.
과연 어떤 구체적인 것이 있는가?
(가)지역의 도서관을 방문하라.
지리학에 대하여 자세한 관심을 갖으며,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주목하라. 그리고 가장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라.
(나)선교회에 편지를 쓰라.
선교회의 정기 간행물을 신청하라(필요하면 요금을 부담하라).
(다)만약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아는 선교사가 있으면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으며,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하고 있는지를 편지로 질문하라.
(라)”세계 기도정보”(조이선교회)를 구입하여, 그것을 읽으며 각 나라의 영적인 필요들을 기록하라. 특별히 한 지역에 대하여.
(마)주님께서 자신의 마음에 선교사, 그 가족, 선교사 모임, 사람들, 나라, 지역들, 라디오, 문서, 의료, 지역개발 등 특별한 분야의 선교사역들을 위해 중보기도 할 수 있도록 기도하라.

3.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을 보내 주소서하라” (누가복음 10장2절)
실제적으로 여기에 사용된 단어들은 영어 성경의 번역보다 훨씬 깊고 중요한 의미를 우리에게 전해 준다.
‘청하다’는 단순히 묻거나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의 진정한 의미는 간청하다’, ‘필요에 대한 감정을 떠나서 아주 진지하게 간청하다 ‘이다.

‘보내다’는 폭력을 동반한 굽히지 않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다르게 번역한다면 ‘밀어내다, 떼밀다, 쫓아내다’ 따라서 이 구절을 다시 읽으며 ‘거대한 필요들을 알아차리고, 추수의 주인에게 진지하게 그의 추수 밭으로 일군들을 보내도록 간청하다.’이다.

– 당신은 이 명령에 충실한가?
– 이것이 당신의 삶의 모습인가?
– 당신은 선교에 사로 잡혀 있는 가?
– 당신은 당신의 신실함에 대한 증거를 깨닫고 있는가?
– 당신의 자원함은 당신의 기도에 대한 응답인가?

4.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12장24절)
여기에 추수의 법칙이 있다. 죽음을 통한 생명. 이것은 또한 영적인 추수에도 적용이 된다. 여기에는 열매를 위한 값이 요구되어 지나 그 결과는 영광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출애굽기 29장을 통해 젊은 이스라엘 청년이 제사장직을 위임받을 때 숫양 위에 손을 얹고 안수하며, 수양을 잡고 그 피를 취하여 오른 귀와 오른 손 엄지와 오른 발 엄지에 발랐다(축애굽기 29장19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죽은 자의 자세로 하나님을 향한 사역을 시작하게 된다. 이것은 바로 전적인 독립적인 삶의 방식의 중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 만약 우리들도 하나님의 사람이 되려면 베드로후서 3장9절의 “…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는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한다. 과연 우리가 선교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고 어떻게 이 구절을 진지하게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

Lisuland 의 J.O. Fraser는 그가 전혀 사용하지도 않았을 토목공학공부를 막 마쳤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중국으로 부르신다는 것을 깨닫았다. 물론 그는 토목공학을 포기했지만 그는 그의 신실한 봉사를 통해 그리스도를 발견한 수백명의 Lisu의 자족들로부터 열매를 얻었다.(Mountain Rain, Eileen Crosmann, OMF)

5.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누가복음 24장46,47절)
모든 민족들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그분의 사랑을 듣고 회개와 죄 용서함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반듯이 지녀야 한다는 것이 분명한 하나님의 의도라는 것을 이 구절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선교는 하나님의 뜻이다. 그는 세상을 사랑하셨으며 그래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다(요한복음 3잘16절). 이러한 잃어버린 사람을 구원 하시고자하는 하나님의 열정을 무시하는 것은 기독교의 표준 이하에 사는 것과 같으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 속에 함께 거주하시는 절대적인 목적을 상실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