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성경적 복음주의자들의 선교이해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에서는 ‘췌이바쓰 강좌'(Chavasse Lecture)라는 명칭으로 위클리프 홀에서 해마다 저명한 세계적 석학들을 초빙해서 세계 선교를 주제로 한 공개 신학대강좌를 주최하는데 1975년에는 죤 스토트박사가 주 강사로 초청되어 ‘Christian Mission in the Modern World’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하였다.

전체 다섯 번의 연속강의중 두 번째 강의의 제목이 성경적 전도인데 이 강의에서 스토트는 “‘선교’를 하나의 포괄적인 단어”라고 하면서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세계 속으로 보내어 하게 하시는 모든 일을 포괄하는 말”이라고 하고 “그것은 복음화와 사회적 책임을 포함한다”고 하고 “이 양자는 인간의 필요에 따라서 애타게 봉사하려고 하는 사랑의 진정한 표현인 까닭”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토트는 복음화에 우선권을 두었다. “본인은 ‘로쟌 언약’의 희생적 봉사라고 하는 교회의 선교에 있어서 복음화가 제일 중요하다는 진술에 동의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정통(Neo-Orthodox)신학계를 대변하는 바르트(Karl Barth)는 그가 남긴 ‘교회 교의학’이라는 8천여쪽의 방대한 기록 가운데 ‘선교’에 대해서는 불과 네쪽만을 할애하였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선교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게 되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는 사건을 선교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하나님의 언약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 기초 위에 화해가 성립하는 것이며 교회는 이 화해의 일에 참여함으로써 선교의 일에 참여하게 된다고 하였다.

바르트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이 화해 사건은 인류 구원을 위한 화해로는 영원히 필요하고도 충분한 화해이므로 교회의 선교는 이것을 그들에게 알리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어 놓은 ‘하나님과의 화해됨의 증인으로서 이를 선포’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선교가 하나님의 구원의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적 사건이 되버린 구원의 정보 제공’에 불과한 것이요 보편적이고도 포괄적인 구원론에 빠지기 쉬운 커다란 과오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보수주의 선교 신학자 죤 영 박사는 선교를 정의하기를 “잃어버린 자의 구원과 토착교회의 설립, 하나님 나라의 건설 및 하나님 교회를 통해서 그의 완전한 말씀을 모든 나라에 선포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사자들을 보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을 말한다고 했다. 이 정의는 1618-1619년에 열린 도르트 총회에서 자기의 저서 ‘교회정치’를 통해서 제시한 보에티우스의 종교개혁적 선교 원리에 크게 영향을 받은 듯하다.

보에티우스는 하나님 자신이 선교의 “효과적인 원리의 기초”이며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이 세상에 선교적 활동을 하시며 교회는 선교하는 기관이라고 했다. 그는 선교를 정의하기를 “이교도를 개종시키고, 교회를 세우며 하나님의 은총과 영광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했다.

2.역사적 복음주의자들 선교 이해
‘역사적 복음주의자’ 혹은 ‘복음적 복음주의자’라는 말은 서로 교체적으로 쓰이는 용어인데, 아더 죤스톤이 자기 자신을 가리켜 사용한 용어이다.

역사적으로 ‘선교’라는 용어가 쓰이기 시작한 것은 약 13세기경 중세부터이다. 라틴어 동사 ‘Mittere'(보내다)에서 유래된 동일 개념의 헬라어 ‘아포스텔로(보내다)’와 ‘펨포'(보내다)에서 선교라는 의미의 어원적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선교라는 의미를 가진 낱말이 신약 성경에 215회 나타나고 있는데, 여기에는 모두 ‘파송’의 의미가 있다.

신약 성경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은 선교의 근거에 대해서,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니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고 말씀하신 것을 보아도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 구원을 위해서 이 땅에 파송 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 받아서(마28:18) 다시 그의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의 근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하는 주장은 성경적 확고한 근거와 복음주의 신학적 확실하고도 강력한 지지를 얻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헬라어에서 ‘보낸다’, ‘파송한다’의 뜻을 가진 동사 ‘아포스텔로’의 명사형 ‘아포스텔로스’가 ‘보냄을 받은 자’ 곧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그리스도에 의하여 보냄을 받은 ‘사도’의 의미로 쓰였고 중세에는 카톨릭의 수도원 중심으로 사용된 용어인데 세상을 향하여 사도의 생활과 사명을 띠고 보냄을 받은 자를 ‘미션나리'(missionary)라고 하였다.

그런데 16세기 이후부터 카톨릭 선교 지역이 아닌 곳으로도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사명자들을 보냈는데 이때 파송받은 자들에게도 ‘미션나리’라는 명칭을 붙여 주었으며 이러한 역사적인 근거 아래 ‘선교’를 ‘사도적 임무’와 동일시하고 ‘선교학’을 ‘사도적 임무의 신학’으로, 선교사를 현대적 사도로 동일시하는 경향도 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 교인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을 향해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었다(고후5:20)고 하였는데 여기는 대사가 되어 파송을 받는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매우 강한 어조로 변증하면서 또한 자신을 선교사로 동일시하였고 선교이 사명을 위해서 존재함을 역설하고 있다(최정만교수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