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에 조직된 이슬람 정치조직

이 조직은 쿠란과 하디스를 현대 이슬람 사회의 지침으로 삼아 그것에 복귀하기를 주장한다. 이 형제단은 이집트, 수단, 시리아, 팔레스타인, 레바논 및 북아프리카에 급속도로 확산되었으며 도처에 학교, 작은 공장, 병원, 군사훈련반 및 정보부서를 세웠다. 이집트에만 참여자가 약2백만명이 넘는다.

1938년 이후 무슬림형제단은 그 외양을 정치화 했는데, 이슬람 세계의 순수화를 요구하면서 서구화, 세속화, 근대화를 통한 모든 직접적인 외국의 간섭과 영향력을 거부했다. 테러단도 조직해, 이집트 정부가 1940년 중반에 약화되었을 때, 형제단은 군주체제와 집권 와프트당에 현실적인 위협으로 등장했었다.

이집트에서 1952년 혁명정권의 출현과 함께, 모든 정당은 해체되었지만 형제단은 지하로 숨어들었다. 학생들 사이에 혼란을 조장한 후에 1954년 2월 다시 불법화되었지만 계속 존속했다. 1954년 10월 26일 알렉산드리아에서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의 암살기도로 거센 탄압을 받았는데 6명의 무슬림 형제단 지도자들이 반역죄로 기소되어 처형당했고 다른 많은 사람들도 투옥되었다. 1966년 형제단의 또다른 지도자 사이드 쿠트브는 반역죄로 기소되어 사형되었으며 여러 해 동안 그 조직은 대중의 눈에 띄지 않았다.

현대의 무슬림형제단

이들은 야권 정치세력이기도 하지만, 이집트 국민에게는 복지와 사회봉사를 목적으로 하는 풀뿌리 민중조직이라는 인식이 더 강하다. 병원을 직접 운영하고, 빈민층을 위한 기금을 모으는 것 등이 이들이 하는 활동이다. 이 때문에 무바라크 정권 30년 동안 피폐한 경제에 시달려 온 서민층은 국가보다 무슬림형제단에 더 의존해왔고, 따라서 신뢰도 더 크다. 나라 구실을 못하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보다 미국이 테러단체로 규정한 하마스가 빈민활동으로 팔레스타인 국민의 신망을 더 받는 것과 비슷하다.

지난 2005년 총선에서는 무소속으로 출마한 형제단 후보들이 전체 의석의 20%인 88석을 차지해 최대 야권 단체가 됐다. 형제단 당선자들은 의회 역사상 가장 높은 출석률을 기록했고, 다른 야권 의원들과 연합해 이집트 국민들을 옥죄온 ‘긴급법안’ 연장 반대 운동을 펼치는 등 그동안 ‘거수기’에 불과했던 의회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최근에는 민주적 체계, 소외계층을 위한 지원 네트워크 형성 등 이슬람개혁을 옹호하고 있다. 형제단은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 파기나 공공장소에서 여성들의 부르카 착용 강요 등을 원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무슬림형제단이 ‘지하드(성전)’를 표방하는 테러집단이라는 딱지에도 이론이 많다. 서방에서는 안와르 사다트 전 대통령을 암살한 ‘이집트이슬람지하드’가 무슬림형제단으로 발전한 것이라고 하지만, 정작 신정체제를 추구하는 지하드 세력은 무슬림형제단을 ‘꼭두각시 이슬람주의자’로 비하한다. 독재정권의 의회에 발을 담금으로써 ‘관제 야권’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슬림형제단의 이슬람 근부주의적 색채가 완전히 탈색됐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기성 정치체제에 보다 적응하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아직 불법단체로 규정돼 있는 무슬림형제단은 ‘포스트 무바라크’시대에서 정치적 정당을 건설, 합법적 활동에 나설 것임을 시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