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 아크바르 후 아크바르 아시하드 알라 일라….”

금요일 정오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자리한 중앙이슬람성원. 예배시간을 알리는 아랍어 노래(아단)가 울려 퍼진다. 이곳은 1976년 문을 연 한국 최초의 이슬람 모스크이다.

한국에 살고 있는 각국의 이슬람 신자들이 성원을 메우기 시작했다. 수염을 기르고 흰 모자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흰옷을 입은 아랍인, 허름한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은 사람, 양복 차림의 백인, 검은색 안경을 쓴 흑인,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를 허리까지 기른 동양인 등…. 마치 인종 전시장을 연상케 할 정도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한국 이슬람교중앙회의 신양섭 사무총장은 “400∼500명의 각국 이슬람 신자들이 금요일 이곳에서 예배를 보는데 대부분 외국인”이라고 말했다. 주로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이집트 모로코 우즈베키스탄 등에서 온 근로자들이다.

중앙회의측에 따르면 한국인 이슬람 신자는 2001년 현재 3만4000여명. 중앙이슬람성원에서 종교 관련 일을 전담하고 있는 이행래 이맘(예배 집전자)은 “구체적 증거가 없기는 하지만 한반도와 이슬람의 만남은 신라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했다.

학계에서는 통일신라기 무슬림 상인들의 교역상품이나 이슬람 세계의 것으로 여겨지는 물품들이 흔히 사용된 기록으로 미루어 9세기 중엽부터 이미 접촉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처용 일행을 ‘동해안에 나타난 모양과 의상이 괴이한 4명의 자연인’으로 묘사한 삼국사기 기록은 ‘처용가’의 주인공이 아랍인이라는 설을 낳기도 했다.11세기 초 고려기엔 ‘대식(大食)’으로 알려진 아랍 상인들이 고려조정과 교역을 자주 시도했다. 고려사에 ‘1024년,1025년,1040년에 아랍 상인이 100여명씩 무리를 지어 수은이나 몰약을 갖고 개경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슬람의 종교와 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된 것은 여말선초(麗末鮮初)기인 13∼14세기 무렵. 당시 원(元)의 간섭을 받았던 고려조정에는 중앙아시아계의 무슬림들이 대거 진출해 있었다. 이들은 고려사에 ‘회회인(回回人)’으로 기술된 투르크계의 위구르 무슬림들로 수도 개성에 이슬람 성원까지 세웠다고 한다.

조선조 세종 때엔 궁중 행사에 무슬림 대표들이 코란을 낭송하며 임금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도 했으며, 그때 이슬람 역법이나 도자기 기술이 도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조 유교사상으로 인해 이 땅의 이슬람은 15세기 중엽 이후 썰물처럼 빠졌다. 이후 1920년대 들어 소련치하 소수민족인 투르크계 무슬림들이 한반도에 망명해와 학교와 이슬람 성원을 건립하기도 했으나 해방과 한국전쟁의 와중에 대부분 해외로 이주한 것으로 한국이슬람교 중앙회측은 보고 있다.

이슬람 종교와 문화가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유입된 것은 13∼14세기 고려시대. 당시 중국의 원나라 조정에서 실권을 쥐고 있던 중앙아시아계 사람들이 고려 조정에도 진출했다. 이행래 이맘은 “고려사에 ‘회회인(回回人)’으로 기술된 투르크계 위구르인인 이들은 수도 개경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했으며 고유 의상과 언어, 문화를 그대로 유지했다”고 설명했다.

한반도와 이슬람 만남의 역사적 발자취
신라시대삼국사기, 처용 일행을 동해안에 나타난 모양과 의상이 괴이한 4명의 자연인으로 묘사. 처용가의 주인공이 아랍인이라는 설이 있음 -신라 고분에서 아랍의 유리기구, 비파, 구슬, 단검, 토용 등이 발굴
고려시대고려사, 1024년, 1025년, 1040년에 아랍상인이 100여명씩 무리를 지어 수은이나 몰약(난초과의 교목으로 방부제로 쓰임) 등의 물건을 갖고 개경을 방문했다고 기록-고려 속요 ‘쌍화점’에 이슬람 사람이 ‘상화떡집 회회아비’라는 표현으로 등장
조선시대세종실록, 회회 노인과 회회 승도들에 대해 기술-조선 초 역법 ‘칠정산내외편’ 중 외편이 이슬람력 원리를 도입해 만든 것이라는 설이 있음
근대1920년대 초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에 따라 피난온 투르크계 사람들이 신의주 혜산 평양 흥남 서울 천안 등지에 흩어져 생업에 종사-6·25전쟁에 참전한 터키군이 후방에 ‘앙카라 학교’를 세우고 전쟁고아를 양육. 전쟁이 끝난 뒤 대민 선교 활동

조선시대에 들어 유교에 의해 이질문화가 배척되면서 자취를 감춘 이슬람이 다시 한반도에 전파된 것은 20세기 들어서다. 1920년대 구소련의 볼셰비키 혁명을 피해 투르크계 이슬람 신자들이 한반도로 피난 와 잠시 머물렀다. 또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터키군의 선교로 이슬람이 한국인 사이에 전파되기 시작했다.

한국인 이슬람 신자들은 65년 한국이슬람교중앙연합회를 만들었다. 76년 이슬람중앙성원이 세워진 뒤 부산, 경기 광주와 안양, 전북 전주 등에도 이슬람성원이 세워졌다.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 이슬람 신자들이 늘면서 각종 이슬람 관련 편의시설도 생겨났다. 이슬람 신자들을 위해 82년 중앙성원 건물에 정육점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지금은 지방마다 1, 2곳의 이슬람 정육점이 있다. 한남동 이태원동 일대에는 이슬람 식당도 많이 생겼다.

예배가 끝나고 성원을 나가는 외국인들 틈에 한국인 한 명이 눈에 띄었다. 대학생 때 종교 관련 수업을 들은 것이 계기가 돼 이슬람교도가 됐다는 안영기씨(45)였다. 그는 “아랍어를 몰라 이슬람에 대한 깊이 있는 공부를 하지 못해 아쉽지만 마음만은 이슬람에 심취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이슬람은 여전히 생소하다. 이행래 이맘은 “많은 한국인들이 이슬람교도가 테러를 저지르는 호전적인 집단으로 잘못 알고 있다”며 “이슬람은 순종 평화 등을 뜻하며 이슬람 신자들은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에 한국도 13억 인구의 이슬람 세계에 대한 보다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김성규기자>

(from :  동아일보,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