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호수에서 흘러나온 요단강이 광야를 적시고 도착하는 곳은 아무런 생물도 살지 않는 사해(死海)다. 해발 7백50m의 모리아산 위에 세워진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길을 따라 내려가면 황량한 유대광야를 지나 사해를 만나게 된다. 예루살렘에서 35㎞거리, 사해는 유대광야를 끼고 지표밑으로 깊숙이 내려가 길게 뻗어 있다.

남북의 길이가 77㎞, 동서 최대의 폭이 16㎞, 면적은 9백65㎢로 갈릴리 호수의 6배다. 해저 4백20m, 코발트색의 바다 외에는 아무것도 살지 않는 주변, 사해는 말 그대로 죽음의 바다다.  사해는 요단강에서 매일 5백만t의 물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언제나 넘치지 않고 일정한 수면을 유지한다. 뜨거운 날씨로 인해 그만큼의 물이 수증기로 증발하기 때문이다. 소금농도가 30%에 달해 아무것도 살지 않지만 주변의 유일한 오아시스 엔게디에는 사해에서 수영을 즐기려는 인파로 붐빈다.

 사해 북쪽 서단에서 해변을 끼고 남쪽으로 5㎞쯤 가면 쿰란이란 고대 거주지가 나타난다. 거주지에서 서쪽으로 3백여m 떨어진 곳, 유대광야의 높은 언덕이 막 시작되는 입구에 이상하게 생긴 동굴 11개가 있다. 이곳에서 금세기 인류역사에서 놀랄만한 것이 발견됐다. 바로 사해사본이다. 1947년 어느날 베드윈족의 양치기 소년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다 언덕 꼭대기에 있는 동굴을 발견하게 된다. 그 소년은 동굴근처까지 가까스로 올라가 돌을 안으로 던졌다. 양이 그 속에 있으면 돌이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 울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항아리가 깨어지는 소리가 났다.

 소년은 굴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작정하고 몇 시간의 노력 끝에 겨우 동굴에 들어갈 수 있었다. 넓고 평평하게 다듬어진 동굴 안에는 질그릇항아리가 여러 개 놓여 있었다. 벤드윈족 소년은 혹시 보물 항아리가 아닐까 생각하고는 손을 집어 넣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양피지로 만든 두루마리가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닌가. 고대 히브리어가 빼곡히 적혀 있는 이 두루마리는 성경 이사야서 등이 적힌 구약 필사본이었다. 쿰란동굴은 도굴되어 수십개의 두루마리들은 아랍인 골동품상을 통해 헐값에 팔려나갔다. 그 해 11월23일 히브리대학의 고고학자 수케닉 교수에게 한 아랍인 골동품상이 전화를 걸었다. 귀중한 물건이 있으니 만나자는 것이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독립전쟁을 벌이고 있는 상태여서 예루살렘은 아랍인과 유대인 구역으로 나눠져 있었다. 다음날 수케닉 교수와 만난 아랍상인은 히브리어로 쓰여진 양피지 한 조각을 들어보였다. 한눈에 고대 책의 필사본임을 직감한 수케닉 교수는 그 상인으로부터 3개의 두루마리를 사들였다. 그후 수케닉 교수에게 4개의 두루마리가 더 있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그러나 그는 4개의 두루마리를 손에 넣지 못하고 53년 사망했다. 수케닉 교수의 아들 야딘 장군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고고학자가 됐으며 54년 학술대회차 미국에 갔다가 4개의 두루마리를 발견하고 정부의 도움으로 25만달러에 두루마리를 사들였다.

 1949년 요르단고고학 연구소의 하딩에 의해 쿰란 제1동굴에서 성서, 비성서문서, 외경 등이 발견됐다. 그리고 52년 제2동굴에서 작은 단편들이 발견됐다. 다시 제1동굴에서 북쪽으로 1.6㎞ 떨어진 곳에서 제3동굴이 발견되었으며 2백74개의 히브리어 및 아랍어 단편과 2개의 동판 두루마리가 나왔다. 같은 해 쿰란 서쪽에서 4개의 동굴이 또 발굴되었으며 에스더를 제외한 성서의 모든 문서와 경문서 주석서 제의문사 등이 발견됐다.

 이 두루마리들은 기원전 2세기의 것으로 판명됐다. 이 두루마리들은 마카비시대에 새로운 종교를 형성하고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 이곳에서 쿰란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던 에세네파사람들이 율법과 예언서를 필사해 자손들에게 물려줬던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는 공동체생활을 했으며 스스로를 이스라엘인이라 부르며 하나님의 통치가 지상에서 이루어지길 기다렸다.

 쿰란공동체는 49년부터 발굴되기 시작했다. 고학자들은 제1동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집터를 발견했다. 복잡한 방들과 책상 의자가 놓여있는 방, 양장피, 잉크가 발굴됐다. 그리고 와디와 연결해 물을 저장했던 물탱크, 주방, 연구실, 기도실, 도기가마, 하수도 등이 잇따라 발굴됐다. 쿰란공동체는 서기 68년 로마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됐다. 그들은 로마군이 쳐들어오자 두루마리 구약성서와 문헌들을 항아리에 담아 동굴에 숨겨 놓았다.

  사해사본이 2천년 가까운 세월을 넘어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것은 매우 건조한 이 지역의 기후 탓이다. 사해사본은 가장 오래된 구약필사본이며 현재 예루살렘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from : 국민일보 미선투데이, 99/04/13)

2001년 11월 20일 기사 추가

첫번째 사해두루마리이 사막의 동굴에서 발견된 후 반세기 마(57년)만에 고고학자들이 고대문서를 판독해 책으로 출판하게 된 것을 축하했다. BC 250년부터 AD 70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두루마리들은 1947년부터 1956년까지 사해의 서쪽 해변의 11개 동굴에서 발견되었었다. 그리고 제한된 국제 고고학자들에 의한 판독이 십여년 동안 진행되었고, 그후 몇몇 내용의 복사본을 공개했으며, 사진으로 만들었고, 새로운 100여명의 학자들이 1991년부터 판독에 들어갔었다.

900개 두루마리와 37권의 주석들이 히브리어와 아랍어로 기록되었고, 15,000벌의 가죽과 파피루스로 만들어 졌다. 이 두루마리가 발견되 곳은 West Bank 의 여리고 남쪽 13.5Km 떨어진 Hirbet Qumran 의 옛 거주지의 옛터에서 발견되었었다.♡

(from : http://www.archpark.org.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