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수백만 무슬림과 그리스도인들이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이주해 나오는 일은 21세기 초반에 일어난 가장 중대한 사건이다. 시리아 내전이 5년간 지속되면서 4백만 난민들이 안전한 피난처를 찾아 주변 국가와 서구 국가로 몰려들었다. 2백만 인구가 이미 이라크를 떠났고 190만 인구는 자국 내에서 유리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듯 자진해서 고향을 등지는 일은 셈족의 종교인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 가운데 동일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아브라함은 고향인 메소포타미아의 갈대아 우르를 떠났고, 모세는 이집트를 떠나 이스라엘 자손을 이끌었다. 아기 예수는 journey헤롯을 피해 부모와 함께 이집트로 갔는데, 이런 일은 유대인과 기독교 역사상 여러 번 일어났었다.

이슬람 역시 아랍어로 ‘히즈라’(hijra)라는 믿음의 여정 개념이 있다. 문자 그대로는 ‘이주’, ‘여정’이라는 뜻을 지닌 ‘히즈라’는 주후 622년에 예언자 무함마드가 동료들과 더불어 메카에서 메디나로 옮겨갔던 길을 찾아가는 개념이다. ‘히즈라’는 메카 지역 상인들의 박해에서 비롯되었고 결국 무슬림 첫 공동체가 결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슬람 역사를 시작하는 원년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이후로는 A.H(After Hijra)로 날짜를 기록하게 되었다.

이슬람의 다섯 기둥 중에 이와 비슷한 개념이 ‘하지’다. ‘순례’라는 의미의 하지는 무슬림이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여정을 말한다(예외도 있음). 평생에 한 번 성지인 메카로 가야하는 것이다. ‘히즈라’와 ‘하지’의 두 가지 개념은 비슷하긴 하지만 미세한 차이점이 있다. 양쪽 모두 자진해서 고향을 떠나는 신앙적 행동이지만, ‘히즈라’는 좀 더 오랜 기간의 이주, 어쩌면 인생의 남은 모든 시간을 보내야 하는 여정을 뜻한다.

8년 후인 630년에 무함마드와 그의 동료들은 의기양양하게 메디나에서 메카로 돌아갔다. 하지만 고향을 떠난 여러 난민들은 다시 돌아갈 기약이 없다. 자신의 이주를 믿음의 핵심인 ‘히즈라’로 볼 난민이 몇 명이나 될까? 물론 분명하진 않지만, 그들이 실제적으로 영적 차원의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면 고통을 이겨낼 용기를 얻을 것이다. 그외 고려해야 할 부분은 특히 서구 사람들의 입장에서 난민들을 받아들이는 문제다. 혹 믿음의 ‘히즈라’에는 유럽인들과 다른 서구인들 사이에 거주하면서 이슬람으로 개종시키려는 열망이 포함된 것은 아닌가? 선지자 무함마드의 ‘히즈라’는 박해를 피하고 이슬람을 견고히 세우기 위해 메카를 떠나는 여행이었다. 여기에는 메디나에서 사람들을 개종시키려는 열망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여느 사람들이 경고하듯 무슬림 난민들이 현지인들을 개종시키려 애쓴다거나 테러 행위에 가담하게 되리라는 걱정은 중동이나 북아프리카에서 온 무슬림 난민들(또한 그리스도인들)을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관대히 베풀어주면서 잘 다스려야 할 것이다. 동기는 다양하지만 이들 수백만 이주자들은 ‘진정한 히즈라’들이다.

이집트의 무슬림 작가 사하르 엘-나디는 ‘진정한 히즈라’를 중대한 다섯 가지를 행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로 정의했다.
첫째, 큰 고통 중에서도 알라를 신뢰하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굳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다.
둘째, 이러한 여정에는 특별한 목적이 있으며 무의미하지 않다는 개념을 가진 사람들이다.
셋째, ‘진정한 히즈라’는 새로운 땅에서도 정기적으로 예배하는 습관과 행위를 놓지 않는 사람이다.
넷째,주변의 사회적 억압에 굴하지 않고 늘 알라를 사모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마지막 다섯째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도 의로운 삶을 살고자 헌신된 사람이다.

‘진정한 히즈라’의 다섯 가지 증표는 유대인이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분명 연관성이 있다. 또한 ‘진정한 히즈라’들이 도착한 지역에서 그들을 어떻게 환대해야 하는지 틀을 제공해 주기도 한다. 일생동안 지속되어 영원에까지 이르는 ‘히즈라’ 여정의 개념은 무슬림이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인지해야 하는 현실적인 일이다. 21세기라는 문맥에서 볼 때 ‘진정한 히즈라’는 세 종교 모두에게 필요한 개념이다.

기도를 통한 무슬림 사랑실천